공연리뷰
이은미가 들려주는 음악과 무대 이야기

아직 꿀 꿈조차 없던 시절엔 꿈을 꾸고 싶었다. 꿈을 꾸게 되자, 그 꿈을 이루고 싶었다. 발버둥쳤고 노력했고 애를 썼지만 내가 그린 그래프는 늘 패배의 축에 가까웠다. 열등감과 절망, 패배의식 속에 나 스스로 등을 돌리고자 마음 먹었을 때, 형들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누구나 실패를 겪는다. 그러니 더 노력하라. 포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식상해요, 그런 말은.
이라고,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때 나는, 재능이란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내겐 드라마가 없었으므로 재능이 없다 여겼고 그렇고 그런 시절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났다. 어떤 시절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을만큼 특징없는 시간들이 내 손아귀 속에서 스르르 흘러나갔다.
전설이 되고 싶었지만 이제 전설의 배경에 불과했던 나는, 전설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의 드라마에 감탄했다. 감탄하며, 그 드라마가 내 인생에 깃들길 바랐다. 그런 드라마가 나를 전설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그러나 드라마가 전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전설이 된 자에게 드라마가 생길 뿐이다. 노력해라. 포기하지 마라. 형들이 해주던 '식상했던 얘기' 속에서 뒤늦게 깨달은 것은 전설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저는 뭘 해야할까요?
시간이 흘러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 그런 질문을 받는다. 전설이 되고 싶어하는 동생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주저한다. 그리고 잠깐, 깊은 생각에 잠긴다.

정상에 선 누군가의 이야기를 펼칠 때 나는 늘 그들의 삶이 남다르길 바란다. 그들의 탁월한 재능, 그들의 탁월한 드라마. 그들의 삶이 달라야 나의 치열함이 빛을 바래지 않을 수 있다. 재능의 탓으로, 특별함의 탓으로 내 삶의 잘못을 돌릴 수 있으니까.
이은미의 첫 앨범이 나온 건 1992년. 나는 그녀를 몰랐다. 대학교에 들어가던 그 해, 노래방에서 대학교 여자 동기가 불러준 "애인 있어요"를 들으며 처음으로 이은미라는 가수를 알았다. 그 후로 그녀의 음악이 삶의 일부로 들어왔다. 이어폰 속에서, 스피커 속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깊었다. 깊고 푸른 강 속으로 발목이 뿌리내리는 느낌이었다.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웅건한 강으로 내 귓속에 지류를 만들어주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자주 위로받았지만 그녀와 내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편적인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보편 밖의 삶이다.
라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그녀가 아주 특별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 곁을 흐르던 강의, 그 웅혼한 깊이가 보편적인 곳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녀는 그저 살았고 노래했고 무대에 섰을 뿐이었다. 그녀의 드라마는 드라마틱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저 음악을 듣다가, 불렀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 음악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미쳐서 걷다 보니 어느새 스무 해가 훌쩍 지났다. 나는 오늘도 그 세월에 하루를 얹고, 또 내일을 채워갈 것이다. 내게 이름을 주고 무대를 선사한 음악이 늘 고맙다."
-<이은미, 맨발의 디바> 중에서
누구나 좋아하던 것들이 있다. 누구나 꿈을 꾸던 것들이 있다. 무언가가 좋아지고, 무언가에 미쳐서 그 길을 걷는 건 누구나 가능하지만 그 길을 걸으며 "어느새 스무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버티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그게 특별한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문제다. 여든의 삶을 버텨온 우리 할머니가 종종, "살다보니 어느새 팔십이구나"하고 얘기하듯이. 이은미는 전설이 되었지만 생각해보니 누구나 그렇게 인생을 버텨가지 않는가. 그녀를 정상이라고, 최고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의 음악에 대한 찬사보다는 그녀의 삶에 대한 찬사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내게 길을 묻던 동생은 나를 동경한다. 녀석이 나를 패배자로 여겼다면 내게 길을 묻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닿는다. 스스로를 패배자라 여겼던 형들에게 내가 물었을 때처럼. 스스로를 패배자라 여기는 형들에게 지금의 내가 그들을 동경하며 물어보듯이. 그리고 그 형들과 같이 나는 동생에게
살아가라, 라고 유치하지만 묵묵하게 그 길을 걸으라, 라고 얘기한다.
삶을 꾸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재능이지 삶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재능은 아니다. 우리는 전설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열할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설이 되어있을 것이니까.
이은미의 자서전엔 이은미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뿐이지만, 이 이야기는 그녀의 노래처럼 우리를 위안한다. 그녀의 치열했던 삶은 특별함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평범함에서 온 것이라고. 뜨겁게 울렁이는 20대의 감성부터, 치열하게 싸워가는 30대의 세상과, 하얗게 타버린 40대, 그리고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걸음을 지닌 황혼의 이야기를 나는 본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를 듣는다.
그녀는 이제 내게 얘기한다.
너도 나처럼 치열했다면, 그리고 치열하다면 너 역시 내겐 전설이다, 라고.
오늘, 꿈을 꾸던 나는 그녀에게 나의 꿈을 약속하고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로 내 꿈에 박수를 보낸다.
* 이 글을 쓴 김재현(astronomer99@naver.com)은 가난한 아르바이트생이다. 대부분 취미로 음악을 하거나 가끔씩 진지하게 글을 쓰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아르바이트이다.

























One a Day GIFT 이벤트 참여완료! 한마디를 많이 작성할 수록
경품에 당첨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참여횟수는 1회만 인정